[기자수첩] 정답 없는 낙태, 모범답안을 찾아야
[기자수첩] 정답 없는 낙태, 모범답안을 찾아야
  • 박선하 기자
  • 승인 2019.02.1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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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학교에서 교육용이라며 보여준 ‘낙태’와 관련한 비디오 영상을 시청한 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영상은 어두운 수술실에서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다리를 벌리게 한 뒤 괴상한 소리를 내는 기계를 자궁까지 삽입해 태아를 없애는 내용으로, ‘낙태를 하면 안 된다’는 결론이었다.

당시 영상을 보면서 느꼈던 공포로 기자는 꽤 오랫동안 낙태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입장이 조금 바뀌었다.

생명 존중은 거론할 여지없이 중요하나, 아기를 키울 경제적 사정이 못되고, 결혼 외 임신이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사회적 분위기 속 여성의 현실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낙태의 양면성을 고민한 사람은 기자뿐이 아니었던지, 과거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됐던 낙태 논쟁은 언젠가부터 수면 위로 떠올라 ‘뜨거운 감자’로 자리 잡았다.

특히 화두가 되는 것은 낙태를 죄로 규정한 형법, 이른바 ‘낙태죄’의 개정 여부다. 이를 두고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해야 할 가치로 보느냐에 따라 찬반이 갈려 팽팽히 대립됐다.

양측의 입장은 모두 윤리적, 사회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논리여서 사실상 한쪽의 의견이 옳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판단을 기다렸다.

오랜 침묵 끝에 정부는 14일 9년 만에 실시한 낙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해묵은 문제의 돌파구 찾기에 돌입했다.

실태조사 결과에는 과거에 비해 낙태 건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이 위기 임신 상황에 놓여있어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낙태를 죄로 규정한 형법 제269조와 수술한 의료인을 처벌하는 같은 법 제270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은 조사대상 여성의 75.4%가 찬성한다는 결과도 있었다.

이 같은 조사 결과는 올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의 위헌성 여부를 결정하는 판단에 주요 근거가 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헌재의 판단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이와 별개로 현재 시점에서 낙태에 대한 시민의식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적으로 낙태와 생명 경시 풍조에 대한 사회 인식을 변화시켜 무조건적으로 낙태를 ‘범죄’로 낙인찍는 편견을 바꿔야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법과 제도도 손봐야 한다. 낙태죄의 처벌 대상에 여성과 의사만 오르는 차별 요소의 개선을 검토해야 한다.

또 여성이 처한 현실을 배려하되 무분별한 낙태의 남발을 억제할 다각적인 대책을 모색하고, 임신, 피임, 낙태 등에 대한 보건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낙태 문제는 ‘닭이 먼저냐 아니면 달걀이 먼저냐’는 난제와 닮아있다. 정답이 없으니 사회적 합의로 모범답안을 모색해야 한다. 끊임없이 고민해 최선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sunha@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