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심장부에서 외친 자유 '2·8독립운동'
일제의 심장부에서 외친 자유 '2·8독립운동'
  • 박선하 기자
  • 승인 2019.02.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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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기념사진. (사진=독립기념관)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기념사진. (사진=독립기념관)

"2000만 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43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유한 오족은 실로 세계 고민족의 하나이라."

1919년 2월 8일. 일본의 심장부 도쿄(東京) 한복판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대한의 독립을 외치는 함성을 울렸다.

식민지시대 피지배국 민중들이 지배국 수도 한복판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것이 범민족적 독립만세운동인 3·1운동과 독립운동단체 조직, 임시정부 수립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2·8독립운동'이다.

당시 일본에 있던 한국 유학생 678명은 도쿄 지요다구 니혼바시강 인근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에 자주 모여 웅변대회를 열었다.

1919년 1월 6일 웅변대회에서는 독립을 열망하는 연설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투지로 불탔고 구체적 행동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거사가 시작됐다. 이들은 이날 조선청년독립단의 독립선언식을 치렀다.

최팔용·서춘·백관수·이광수 등 11명이 실행위원이 됐다. 향후 친일파로 변절한 이광수가 선언문을 기초했다.

2·8독립선언서에는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을 규탄하는 내용으로 꾸려졌다.

독립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피를 흘리는 싸움을 할 것이라는 강경한 투쟁 의지도 담겼다.

600여 회원의 환호 속에 백관수가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주창했다.

선언식이 끝날 무렵 일본 경찰이 대회장으로 난입했다. 당시 외무성이 발간한 '재경조선인 최근 상황'에 따르면 현장에서 유학생 27명이 체포됐다.

일제의 방해에도 유학생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2·8 독립선언 직후인 12일과 24일에 각각 100명이 넘는 유학생들이 일왕 거처 바로 인근인 히비야 공원으로 뛰쳐나가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거족적인 항일운동을 모색하던 국내외의 민족운동가에게 큰 자극이 됐다.

결국 2·8독립운동은 같은 열망을 품은 조선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3·1운동의 결정적인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이날 오전 11시 서울 YMCA와 일본 도쿄 재일본한국 YMCA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sunha@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