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구입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 상식이다.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냐?”는 말도 있지만, 제값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금액으로는 부실한 물건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제값을 주지도 않으면서, 물건을 주지 않으면 장사를 못하게 한다면 어떨까? 이런 일이 바로 공공건설공사 시장에서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공공 발주기관이 예산 부족이나 예산 절감 등을 이유로 공사비를 자의적으로 삭감해 발주하고, 이를 수주한 건설기업의 이의제기나 계약금 증액 요청을 거부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공사를 수주한 기업들은 계약을 포기할 경우 입찰보증금을 귀속 당하거나 부정당제재 처분을 받을까 우려해 손실을 감수하고 공사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와의 계약에서 불이익을 받을 경우 이의신청을 할 수 있는 ‘이의신청제도’가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국가계약법)과 ‘지방자치단체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지방계약법)에 마련돼 있으나, 공사비 산정과 관련한 사항은 이의신청 대상이 아니다.
국가계약법과 기획재정부 ‘예정가격작성기준’이 공공 건설공사 예정가격 산정 시 고려해야 하는 기준과 입찰 시 산출내역 등 발주자의 제반 정보 제공 의무와 부당 감액 및 과잉 계산의 금지, 불가피한 가격 조정에 대한 고지 의무 등을 명시하고 있으나, 발주기관이 이를 어겨가며 공사를 발주하더라도 건설기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지난 2016년 대법원이 건설공사비의 산출기준이 되는 품셈의 수량을 임의로 조정해 예산을 삭감하고 공사를 발주한 공공 발주자에게 이로 인해 발생한 건설기업의 손해를 배상하도록 판결했다. 공공 발주기관이 자의적으로 정상 규모보다 공사 예산을 축소하거나 삭감해 발주하더라도, 이를 수주한 건설기업이 울며 겨자 먹기로 손해를 입어가며 공사를 완성할 수 밖에 없었던 불공정 관행이 개선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2년여가 지나도록 진전은 미흡하다. 지난해 말에야 공사비 산정에 대한 이의신청을 허용하는 지방계약법 개정안이 발의됐을 뿐이다.
물론 입찰에 참여하는 기업이 발주기관이 제시한 예정가격의 적정 여부를 검토한 뒤 입찰에 참여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고의적인 물량 삭감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인한 예정가격의 삭감은 발주기관이 공사를 낙찰받은 기업에게 손실을 강요하는 것이며, 계약포기가 어려운 여건까지 고려하면 이는 발주기관의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갑질과 다름 없다.
특히 공사 산출내역서를 낙찰 결정 이후 제출하도록 돼 있는 100억원 미만(추정가격)의 적격심사제 대상 사업의 경우 입찰과정에서 예정가격 과소 산정 여부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환경이다. 실제 최근 보고된 공사비 부당삭감 사례들은 대부분 중견·중소기업이 참여하는 소규모 사업들로, 공사비 관리 및 재정 역량이 취약한 중견·중소기업이 피해에 더욱 노출된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의 경우 입찰 과정에서 발주기관과 입찰 참여기업이 설계도서, 물량내역의 타당성을 상호 검증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일본은 2005년 법령 개정을 통해 발주기관의 예정가격 부당삭감 행위를 금지하고 근절 이행여부 확인을 위해 정부가 공공기관 전수조사를 시행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나친 공사비의 삭감은 건설공사 품질 하락과 안전 취약의 원인이 되며, 공사 수주기업의 부실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 공공공사 예정가격의 적정성 검토기능을 강화하고, 예정가격 조정내역 고지를 의무화하는 한편, 공사비 이의신청제도를 국가계약법과 지방계약법을 통해 의무화해야 한다. 공공 발주기관의 과도한 예정가격 삭감과 같은 불공정 관행을 방지해 공정한 공공공사 거래문화를 정착시키고, 입찰절차의 공정성과 투명성 제고, 공공 발주기관의 신뢰성 확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