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한 건에 삶이 멈췄다…구멍 뚫린 '초연결사회'
화재 한 건에 삶이 멈췄다…구멍 뚫린 '초연결사회'
  • 박선하 기자
  • 승인 2018.11.2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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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인터넷·카드결제 등 먹통…치안 마저 차질
정부·업계 대응태세 부실… "안전·보안 강화해야"
27일 오전 KT 아현지사 앞. (사진=연합뉴스)
27일 오전 KT 아현지사 앞. (사진=연합뉴스)

KT 아현지사 지하 통신구 화재가 '초연결 사회'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통신구 화재 한 번으로 일상의 불편을 넘어 경제·사회·안보 등 한국 사회의 기반이 위협받고 붕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돌아보게 한 것.

이번 화재를 계기로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우리나라 위상에 맞춰 기반 시설의 방재 대책을 철저히 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24일 오전 11시께 발생한 KT 아현국사 화재는 이틀 넘게 서울 서대문·마포·용산·중·은평구 등 5개 구와 경기 고양 시민 일부의 생활을 '마비' 시켰다.

전화선 16만8000회선, 광케이블 220세트를 태운 불은 일대에 KT가 제공하는 유·무선 전화, 인터넷, IPTV, 카드결제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에 줄을 서고, 밥을 먹고 결제를 위해 동전을 세야했다.

피해는 개인의 불편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KT 통신망을 사용하는 카드 단말기와 포스(POS)가 먹통이 되면서 커피전문점, 편의점, 식당 등 상가는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아찔한 상황도 연출됐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경찰청·소방청·국방부의 일부 통신에서까지 장애가 발생했고, 생사가 오가는 병원에서도 전산망이 멈추고 호출에 문제가 생겼다.

통신구 화재 한 번에 '사회적 대혼란'이 일자, 이번 화재가 우리나라의 안일한 통신사고 관리체계를 여실히 드러냈다는 지적이 거세다.

실제로 이번 사고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IT 강국의 위상이 무색할 정도로 통신망 곳곳의 허점을 노출했다.

이번 화재의 피해가 커진 직접적 원인으로 '방재시설 미비'가 꼽히는 점부터 그렇다. 사고가 발생한 통신구는 소화기 단 1대만 비치돼 있었을 뿐 스프링클러는 설치돼 있지 않았다.

이는 느슨한 소방법 규정의 영향이다. 현행 소방법에서 지하구 길이가 500m 이상일 경우에만 연소 방지 시설과 자동 화재탐지 설비를 갖추도록 하고 있다.

불이 난 통신구는 통신망과 광케이블 등 통신설비만 설치된 '단일 통신구'이고, 길이도 150m 불과해 스프링클러·소화기·화재경보기 등 연소방지설비 의무설치 대상이 아니었다.

백업 시스템 부재도 피해를 키웠다. 사전에 통신망이 훼손됐더라도 다른 망을 거쳐 우회할 수 있도록 이중화 작업을 했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정부는 통신국사를 영향력에 따라 A, B, C, D 등 4개 등급으로 나눈다. A~C등급은 통신망 손상 시 백업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이원화돼 있지만 D등급은 의무조항이 없다.

현행 규정대로라면 사실상 D등급 국사에서 또다시 화재가 발생하면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통신 마비 사태가 불가피한 셈이다.

곳곳에서 발견된 구멍에 정부와 업계는 사고가 일어난 직후 발 빠른 대책 마련에 나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통신사가 자체 점검하는 D급 통신시설을 포함해 중요 통신시설 전체를 대상으로 실태 점검에 착수해 연말까지 통신망 안전대책을 수립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500m 미만 통신구의 경우에도 화재 방지시설 설치를 추진하고, 통신 3사 간 이동 기지국 및 와이파이를 상호 지원하는 등의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다음달 5G(5세대 이동통신) 서비스가 상용화하면 부실한 통신설비 관리는 보다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만큼 신속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5G 시대에는 자율주행차 기술은 물론 IoT(사물인터넷), 스마트 홈 서비스 등이 본격화해, 예고 없는 통신 장애는 상상을 초월한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IT업계 관계자는 "통신기술 발전과 함께 안전이나 보안 취약점은 늘 도사리고 있다. 물리적 안전이나 정보보안이 붕괴되면 순식간에 일상이 마비될 수 있다"면서 "초연결사회로 갈수록 더욱 안전과 보안도 중요하다"고 경고했다.

sunha@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