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적자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연료비와 전력구입비가 늘어났고, 신규 설비 투자를 확대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옹색하다. 비용 상승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신규 투자를 과도하게 확대한 것은 명백한 경영 실패다. 정부의 무리한 탈원전으로 발생한 엄청난 비용을 무리하게 떠안았던 것도 적자를 키운 원인이다. 정부의 불법·부당한 간섭에 휘둘려서 한전의 정상적인 경영까지 포기해버린 경영진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전력 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공기업인 한전의 경영 악화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한전의 적자는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불황에 허덕이는 기업과 소비자가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다. 한전의 적자가 자칫 국가 경제를 망치고 국민 생활을 궁핍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기폭제가 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전의 몰락을 두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한전은 우리나라 근대화와 현대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기업이다. 고종 황제가 에디슨전구회사에서 거금을 들여 수입한 석탄발전기와 전구로 경복궁을 밝힌 직후였던 1898년에 설립된 한성전기가 한전의 모태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산업화를 선도했고 세계 최초로 3세대 원전(APR-1400)의 상업 운전을 성공시킨 첨단 기업이다. 소액주주의 지분이 36%나 되는 국민기업이면서 동시에 뉴욕증권거래소에도 상장된 국제기업이기도 하다.
그런 한전이 악성 적자를 기록한 것은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연료와 전력구입 비용이 크게 늘어난 이유는 삼척동자도 안다. 92.6%였던 원전의 평균 가동률을 올해 1분기에는 54.8%까지 떨어뜨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국민 안전을 위해 설비 점검을 강화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설득력이 없다. 그동안 한전이 원전을 부실하게 관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멀쩡한 원전을 세워놓고 비싼 석탄과 LNG 화력을 마구 돌린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한전 경영의 정치화도 적자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경제성을 핑계로 월성 1호기의 영구정지를 결정해버린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한전의 자회사인 한수원이 무려 7000억을 투자해서 재정비한 월성 1호기는 앞으로 20년 이상을 안전하게 가동할 수 있는 한전의 훌륭한 발전 자산이다. 월성 1호기만 가동해도 새만금에 세계 최대 규모의 재생에너지단지를 건설할 이유가 없어진다.
원전 폐로의 절차는 원자력진흥법·에너지법·녹색성장기본법·전기사업법 등에 구체적이고 명백하게 규정돼 있다. 어디에서도 한전 이사회의 역할을 찾아볼 수 없다. 한전은 정부의 폐로 결정을 수동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기관일 뿐이다. 법과 제도를 벗어난 섣부른 정치적 판단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끝까지 책임을 묻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불문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회사 이름에서 ‘원자력’을 빼버리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으로 정권의 주목을 끌어보려는 시도는 부끄러운 것이다.
한전공대 구상도 정치권의 압력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인 결과로 한전 경영을 악화시킬 요인이다. 인재양성과 교육은 한국전력사업법에 정한 한전의 역할을 확실하게 벗어난 것이다. 총장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영입하겠다는 발상은 노벨상 수상자에게 모욕이다. 한전공대가 배출하는 인력의 미래도 불확실하다. 자칫하면 한전이 채용비리를 저지르는 집단으로 지탄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지역 주민을 위한 발상도 아니다.
이제 한전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치권이 아니라 국민이 한전의 주인이다. 모든 발전 설비는 위험하고 환경에 부담을 준다. 그런 설비를 안전하고 깨끗하게 관리하고 가동하는 것이 한전의 가장 막중한 사회적 책무다. 친환경 발전은 비현실적인 꿈일 뿐이다. 합리적인 전원 믹스와 발전설비의 관리에 대한 전문성으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한전의 새로운 목표가 돼야 한다. 정권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공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