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부, '강제징용' 소멸시효 넘기려 재판지연 정황
양승태 사법부, '강제징용' 소멸시효 넘기려 재판지연 정황
  • 박선하 기자
  • 승인 2018.11.06 13:5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구권 2015년 소멸 판단…"다른 피해자도 소송불가"
보상금 '수백만원에 무마' 검토…"국가배상 가능성有"
지난 달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장에 판사봉이 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달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장에 판사봉이 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일제 강제징용 재판을 소송시효 만료 때까지 고의로 지연시켜 소멸 시효를 넘기는 방안을 검토한 정황이 포착됐다.

이는 다른 피해자들의 추가 소송을 봉쇄하고, 피해자와 일본 정부의 지대한 관심을 받는 사건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하는 사법부의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6일 법조계에 따르면 2013년 12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장래 시나리오 축약(대외비)' 문건에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인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해 이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문건은 당시 차한성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의 공관에 찾아가 재판 지연 방안을 논의하고 온 직후 사법정책실에서 작성됐다.

이 문건에는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해 민사 손해배상 소멸시효가 3년이라는 점에 주목, 소송 지연 방안을 논의한 내용이 담겼다.

법원행정처는 문건에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을 기산점으로 삼고 민법상 소멸시효 3년이 지나도록 재상고심 결론을 미루는 방안을 구상했다.

대법원은 2012년 5월 원심을 깨고 손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고, 서울고법은 2013년 7월 "원고들에게 각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이와 관련 법원행정처는 법원 판단대로라면 강제징용 피해자 20만명에게 총 20조원을 지급해야 하는데 이는 재원 조달 등의 이유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봤다.

따라서 소송을 고의적으로 지연시켜 소멸시효가 지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법원행정처가 제시한 방법은 ‘화해·조정 시도’다. 파기환송심이 책정한 위자료 액수를 문제 삼아 사건을 고등법원에 돌려보낸 뒤 화해·조정 등을 빌미로 시간을 끄려는 전략이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 파기환송과 조정을 거치는 동안 나머지 피해자들은 소멸 시효가 완성돼 소송 제기가 불가하다는 점도 고려했다.

재판 지연으로 소송을 제때 제기하지 못한 피해자들에게는 파기환송심에서 인정된 1억원이 아니라 별도로 설립된 재단을 통해 수백만원의 배상금을 받게 하겠다는 구상을 세웠다.

소송 대신 한일 양국 정부와 일본 기업이 함께 출연하는 재단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구제하겠다는 대안이다.

이와 관련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독일의 '기억책임미래 재단'과 같은 재단을 설립, 1인당 수백만원 선에서 보상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법원행정처의 계획에는 배상판결이 확정되고 추가 소송이 이어질 경우 한일관계 악화와 1965년 청구권협정의 정당성 훼손을 우려한 박근혜 청와대의 의중이 반영됐을 것으로 검찰은 봤다.

최근 추가 소송 가능성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소멸 시효’의 시점도 양승태 사법부는 2015년 5월로 명확히 판단했다.

지난달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확정하면서 일본 기업의 소멸 시효 주장을 배척했다. 다만 정확한 시효 시작과 끝은 밝히지 않았다.

법원행정처 문건은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 선고 후 3년 이내'를 추가 소송이 가능한 기간으로 언급하면서, 재단 설립 시점도 소멸 시효 완성을 고려해 주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배상 액수 문제와도 연결됐다. 법원행정처의 '독일의 기억, 책임, 미래 재단 검토' 문건에서는 소멸 시효가 완성된 날을 기점으로 배상 액수가 달라질 수 있다고 언급됐다.

소멸 시효가 끝나기 전이라면 판결과 비슷한 금액의 배상이 필요할 수 있지만, 시효가 완성된 경우 법적인 청구가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해 배상액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법조계에선 만약 법원행정처의 이런 전략이 실제 재판에 영향을 미친 것이 확인되면 소송을 제때 내지 못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다른 피해자들이 추가 소송을 내지 못할 수 있다는 위험을 인식하고서도 법원행정처 등이 고의 또는 불법으로 재판을 지연시켰다면 국가가 배상책임을 물어야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sunha@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