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성 수복전투는 임진왜란 최초로 의병장들의 지휘로 연합해서 대승리를 이끈 전투였다. 선조 임금은 “이순신 장군의 명랑해전과 임란사에 가장 통쾌한 승전”이라고 말했다. 유성룡·김성일·김면 등도 “명랑해전 승리와 영천성 승리를 동일시한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전세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큰 승리였고, 의병사를 다시 써야 할 위대한 사실들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1592년 4월14일 왜병 15만명이 부산 앞바다에 침입 9일 만인 4월23일 무방비 상태인 영천성에 쳐들어왔다. 왜병들은 영천성에 1~2천여 명의 군사를 남기고 나머지 군사들은 도성을 향해 계속 북상하면서 가는 곳마다 관군은 참패를 당했다.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몽진을 떠나자 왜병들은 도성과 함께 평양성까지 점령하면서 전 국토가 왜군의 행포에 몸서리를 쳤다.
정세아·정대임 영천의병장과 권응수 신년의병장은 각각 의병을 일으켜 5월부터 박연전투, 한전전투, 대동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왜병과 맞서 싸워 많은 전과를 이루면서 사기가 충전하자 영천성 복성전투 준비를 갖게 된다.
하양·의흥·자인·경산·청송·의성·경주 등 의병들에게 연통을 해 모은 영천성 수복전투에 참여한 의병은 3560여명이었다.
영남 유초사 김성일에 의해 연합부대의 명칭을 ‘창의정용군’이라하고 대장은 권응수, 좌총은 신해. 중총 정대임, 우총 최문병이 맡았다. 선봉장 홍천뢰, 별장 김윤국, 작전찬핵총사 정세아 정담으로 구성했다.
7월27일 새벽 영천성 수복 백병전에서 왜군은 거의 전멸했고 경주로 탈출한 이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영천성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육지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조선반도에서 철수하는 계기가 됐다.
영천성 수복 4일 후인 8월1일은 청주성이 복성 됐다. 청주시민들은 20여 년 전부터 청주최고의 전승축제를 갖고 있다. 임진왜란 승첩지인 남해, 진도, 충무, 진해, 진주 등에서도 매년 대대적인 전승축제를 갖고 있다.
영천성 수복은 500의사로 표현되는 의병장 모두의 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경상좌병사 박진이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고도 자신이 지휘해 전쟁을 승리한 것처럼 조정에 보고하면서 2~3명의 장수들에게만 공적을 포상하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공로만 차지한 관군의 존재로 인해 의병활동의 빛이 퇴색됐다.
1754년에 전승지인 이곳 영천명원루 경내에 전승비를 건립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손해 강물에 버린 이후 현재까지 영웅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무관심 속에서 역사학계까지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경북 영천시민을 중심으로 구성된 ‘임난 영천성 복성전투 승전 기념사업회’가 정규정씨(BBS명예회장), 지붕스님(용화사주지), 정연화씨(영천문화원장)를 공동회장으로 선출하고 본격적인 기념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늦은 감은 있으나 그나마 다행이다.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려했던 사실이 묻혀선 안 된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도록 임진왜란 당시 영천대첩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재조명하는 사업들이 조속히 추진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