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저승사자’로 불리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재벌개혁 구상이 드러났다. 그는 단기간에 몰아치는 ‘개혁’이 아닌 점진적 ‘진화’를 선택했다. 24일 입법 예고된 공정거래법 전면 개정안은 김 위원장의 이런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개편안은 지주회사 지분율, 기존 순환출자 해소 등 사전규제는 최소화했다. 반면 ‘일감몰아주기’를 통한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나 금융보험사나 공익회사를 통한 편법적 지배력 확대 등 총수일가의 전횡에는 강력한 규제가 동원된다.
항간에서 우려했던 ‘기업 때려잡기’식 규제는 일단 피하게 됐다. 하지만 총수일가의 지배력을 편법적으로 강화하는 방식에는 과감하게 칼을 대겠다는 결의는 줄어들지 않았다.
개편안은 지난달 말 특별위원회가 내놓은 권고안보다 다소 낮아진 수위다. 지주회사 의무보유 지분율 강화와 기존 순화출자 해소, 금융보험사만의의결권 5% 추가제한 등은 삭제됐다. 일부 특정기업을 겨냥한 규제를 만들 경우 법통과도 쉽지 않고 규제의 실익도 크지 않다는 판단으로 해석된다.
김 위원장은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일부 기업에 한정된 문제를 딱딱한 법률을 통해 규제하는 것이 비용이나 정치적 저항 등을 감안하면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밝혔다. 예외적 사례는 분명히 개선돼야 할 필요가 있지만 공정거래법이라는 딱딱한 법률보다는 상법, 금융법, 법인세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해결하는 게 보다 효과적이고 지속가능한 개혁방안이라고 판단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최근 ‘재벌 저격수 김상조’가 변했다거나 공정위가 재벌개혁의 고삐를 놓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난의 소리가 적지 않았다. 재야시절부터 재벌에 맞서 싸워왔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 뼈아픈 얘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택한 점진적 진화는 그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해법으로 보인다. 급격한 규제 강화 등으로는 재벌개혁이 또 다시 후퇴하고 별다른 성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오랜 경험치에서 나온 대안인 것이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공정거래법 집행에 ‘경쟁원리’를 도입한다는 원칙이다. 공정거래법 사건과 관련 가격, 입찰, 시장분할 등 경성담합의 경우 누구나 검찰에 고발할 수 있게 된 점이 포인트다. 공정위의 강력 무기였던 전속고발권을 폐지한 배경이다.
한마디로 공정위가 모든 것을 직접 나서서 해결한다는 ‘만기친람’식 시장질서 확립보다는 공정거래법 집행의 효율성과 집중도를 높이는 방안을 최우선에 놓고 재벌개혁을 점진적으로 이뤄가겠다는 김 위원장의 의중이 강하게 담겼다.
지난해 말 김 위원장이 지난해 말 기자간담회에서 ‘재벌 개혁은 레볼루션(혁명)이 아니라 이볼루션(진화)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재벌개혁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깊은 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해법이 성과를 낼 수 있기를 응원한다.
[신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