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먹먹한 4월16일을 벌써 네 번째 맞는다. 지난 2014년 4월16일 생때같은 304명의 생명을 차가운 진도 앞바다에 빼앗겼다. 그 중 5명은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해 미수습자로 남아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봄이 와서 꽃이 피어도 좋은 줄 모르고 산 지 4년이 됐다’고 한다.
지난해 11월18일 미수습자 가족들은 3년 넘게 떠나지 못했던 진도 팽목항과 목포신항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그렇게 그들은 집에서도 ‘4월16일’ 그날처럼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세월호 참사 당일 수백 명의 어린 목숨들이 희생될 때, 그들의 죽음을 모욕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벌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 진실이 무엇인지 명명백백하게 밝히지 못하고 시비를 따지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현실에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다.
당시 국정의 총 책임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이들이 생사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는 절박한 시간에도 침실에서 10시가 넘도록 잠을 잔 것으로 밝혀졌다. 최고 권력자의 패덕을 은폐하기 급급해 고위 관료들과 홍위병들은 허위보고와 거짓 증언으로 양심을 팔아먹었다. 최근 검찰 수사로 인해 일부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 책임을 회피하며 또 다른 거짓을 양산하고 있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유독 우리 역사에서 4월은 수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많은 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잡혀갔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4·19혁명도 곧 58주기를 맞는다. 4·19혁명의 경우 파렴치한 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시민 스스로 확인했던 승리의 날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숨져 간 수백 명의 희생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시릴 수밖에 없다.
수천 명의 양민 학살로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수많은 상주를 만들어 낸 제주의 4·3항쟁도 4월의 일이다. 어린아이, 임산부, 노인들까지 무차별 학살된 4·3항쟁의 경우,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다. 이들 주검들은 신원(伸寃)은커녕 죽었다는 사실조차 함구해야 했던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제 겨우 10년 남짓 전인 노무현 정부 때에 들어서야 그 진실의 일단이 공개됐고 쉬쉬하던 죽음의 의미들도 비로소 명예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해마다 4월이면 도돌이표처럼 떠오르는 말이 ‘잔인한 4월’이다. 1922년 시인 T.S 엘리엇(Eliot)은 자신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면서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다. 100년이 지나 지금 우리는 진정한 재생을 가져오지 못하고 공허한 추억으로 남는 고통을 가장 잔인하다고 여긴 것으로 해석된다.
앞으로의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닌 진실과 희망의 아지랑이로 가득한 새로운 봄날이었으면 한다. 올해 4월이 그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원년이 되길 바란다.
마침 오는 27일엔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북한의 비핵화가 주된 주제이지만 분단이란 역사적 아킬레스건을 해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겨울 내내 걱정했던 안보 불안을 해소하는 동시에 남북이 공존·공영하는 시대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분수령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