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대부분 ‘초토화 작전’서 발생… 1만5000여명 사망
한라산 금존 지역 전면 개방으로 종식… 7년7개월 만
해방 이후 이념 간 대립으로 3만여명이 무참히 학살됐던 비극, ‘제주4·3사건’이 올해 70주년을 맞았다.
여전히 엄청난 슬픔으로 기억되는 이 사건은 1947년 3월1일 해방 후 두 번째로 맞는 제주의 3·1절 기념대회에서 경찰이 탄 말의 발굽에 어린아이가 차이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말에 타고 있던 기마 경찰은 무심히 지나갔고 이를 본 군중들은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이에 군정 경찰은 구경 중이던 민간인에게 총탄을 쏘아 부었고, 이로 인해 6명이 사망했다. 특히 사망자 중에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과 열한 살 배기 아이도 포함됐다.
이후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3월10일 민관 합동 총파업에 돌입했다. 제주 관공서와 직장인 9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 군정은 제임스 카스티어(James A. Casteel) 대령이 이끄는 조사단을 제주도로 파견해 사태파악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작성된 미군의 정보보고서에는 이번 사태를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다’ 등으로 규정하며 제주도민의 경찰에 대한 반감과 남로당의 대중선동에 의해 3·10 총파업이 증폭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자 서북청년회와 경찰은 ‘좌익색출’이라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쳤고 당시 1년 동안 2500여명이 구금됐다.
도민 탄압이 지속되면서 이듬해인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 등을 공격하면서 무장투쟁을 일으켰다.
무장대의 습격을 계기로 미군정의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제주도에는 10월17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내륙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까지 발표됐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제주도에 11월17일을 기점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4·3사건의 희생자 대부분은 중산간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진 초토화 작전에서 발생했다. 1948년 한 해동안 희생당한 제주도민의 숫자는 1만5000여명에 달했다.
토벌대는 마을 주민들을 압박하기 위한 학살과 방화를 지속했다. 그 해 12월 말에는 진압부대가 바뀌었으나, 강경진압은 지속됐다.
게다가 주민들을 상대로 한 학살은 토벌대에 의해 이뤄진 것만은 아니다. 무장대도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 일원에서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12월31일 계엄령이 해지되고 1949년 6월에는 무장대 사령관인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무장대가 대부분 궤멸됐다.
하지만 탄압은 계속됐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됐던 4·3사건 관련자들이 즉결 처분됐다. 처형당한 수감자들은 3000여명에 달한다.
잔혹했던 학살은 제주도 경찰국이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존 지역을 전명 개방하면서 발발 이후 7년 7개월만에 종식됐다. 이 기간 학살당한 제주도민의 수는 2만5000여명에서 3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이후 4·3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간헐적으로 움직임이 이어졌으나 비로소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도가 돼서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됐다.
이후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고 노 전 대통령은 4·3사건이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국가 차원의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신아일보] 박정원 기자 jungwon933@shin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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