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아십니까.
들어본 적은 있지만 어떤 사건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국민은 몇 안된다. 기자 역시 4.3에 대해 끝없이 무지했다. 적어도 지난 주말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진 말이다.
지난달 23~24일 전국 언론인 초청 제주 4.3 평화기행이 진행됐다. 한국기자협회 소속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이번 행사는 70주년을 맞아 제주 4.3을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보통 국민들이 아는 제주 4.3은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 당한 날 정도다. 물론 그보다 깊게 아는 국민도 많겠지만 그 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것이 현실이다.
첫 일정으로 찾은 곳은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4.3평화공원이었다. 이 곳은 제주도 민간인 학살과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2008년 3월28일 개관했다.
제주4·3평화기념관을 비롯해 위령제단, 추념광장, 수변공간 봉안관, 행방불명인표석, 조형물(귀천, 비설), 위령탑, 각명비 등으로 이뤄진 이 곳을 둘러보면서 4.3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라는 점에 눈을 뜨게 됐다.
4.3은 1947년 3·1절 행사 중 기마경찰의 말 뒷굽에 어린아이가 맞았는데 기마경찰이 무시하고 그냥 가자 이를 항의하는 일반인들에게 총격을 가하면서 6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은 젊은 여자와 학생도 포함돼 있었다. 이 일은 4.3사건의 도화선이 된다.
이후 남북 통일정부를 주장하는 제주도민들이 무장봉기에 나서고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개엄령을 선포, 1948년 4월3일부터 1954년 9월까지 긴 시간에 걸쳐 수만명이 학살당한다.
4.3의 내막을 알게될수록 결코 가볍지 않은 여행길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아 참석자들의 발걸음은 무거워졌고, 마음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든다. 왜 제주 4.3 뒤에는 5.18광주민주화항쟁이나 5.16군사 쿠데타처럼 사건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명칭이 붙지 않은 걸까?
4.3은 아주 긴 시간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한국 역사의 최대 비극이다. 4.3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목소리가 나온 것도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4.3 뒤에 붙을 명칭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다음날 일정 역시 빼곡히 4.3을 알아가는데 집중했다. 송악산 입구쪽에 위치한 섯알오름학살터를 비롯해 진지동굴, 고사포 진지 등이 그때의 처참함을 오롯이 나타내고 있었다.
뒤이어 동광 무등이왓을 찾았을 때 이번 여행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홍춘호 할머니와 만날 수 있었다.
홍춘호 할머니는 4.3 생존자로 그때 당시 11살이었으며 그날의 아픔을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서글서글 웃는 모습으로 전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녹아있는 아픔을 절대 공감할 수는 없지만 산증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여 오는 듯했다.
이번 일정을 다 마치고 나서 언론인 팸투어에 참가한 이들에게 주어진 숙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을 때 답은 하나였다.
우리의 소명은 바로 4.3을 알리는 것이다.
4.3의 진실은 앞으로 계속 규명해가야 한다. 특히 70주년인 올해 많은 사람들이 합심해서 진실을 밝히고 대한민국 모두가 아는 역사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해야 할 한마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팸투어의 주제이기도 했던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이다.
[신아일보] 고아라 기자 ara@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