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4·19 혁명이 일어난 지 쉰여덟 돌을 맞는다. 기념일은 한 달 남았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4월 혁명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에 저항한 학생 시위에서 시작됐다. 캠퍼스를 나선 대학생들이 서울 중심가에 모이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까지 동참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 붕괴 과정에는 아직도 대중들에게 덜 알려진 얘기가 있다. 2·28 민주운동이 3·15 의거와 4·19 혁명에 미친 직간접 영향은 대표적 사례이다. 그걸 간략히 요악하면 이렇다.
출범 초기만 하더라도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 반응은 대체로 괜찮았다. 청렴하고 윤리적이라는 인상을 줬다.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백발의 애국투사이자 그 시절에는 아주 드물게 미국 명문대학 박사학위를 가진 대통령의 이미지도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합리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강압적 성격을 드러냈다. 실망과 불신은 6·25 전쟁 중에 실책을 거듭해 나라를 존망의 위기상황으로 내몰고 위법과 탈법으로 권력기반을 굳히려는 시도가 노골화하면서 빠르게 번져나갔다.
자유당 정권은 전쟁 중이던 1952년 1월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가 부결 당하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끝내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54년에는 종신집권을 위해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불법 통과시키는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했고, 1958년 12월 들어서는 자유당 단독으로 국가보안법을 개정했다.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민심은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당장 1958년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러한 민심 변화가 그대로 나타났다. 비록 자유당이 안정 의석 확보에 성공했으나 총득표수의 절반을 조금 넘게 득표해 민주당과 표차가 얼마나지 않았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자유당 지도부는 대책 마련을 서둘렀다. 특히 1960년 3월 정·부통령 선거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치러서는 힘들 수 있겠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실제로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재집권하게 됐지만, 자유당의 관심은 고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경우 직위를 이어받을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쏠렸다. 노골적인 탈법과 불법과 강압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가장 먼저 저항의 깃발을 든 이는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이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교문을 뛰쳐나와 자유와 정의 회복을 외쳤다. “인류 역사에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중략)……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경북고등학교 학생대표는 그렇게 소리쳤다.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2·28 시위는 전국적으로 침묵하던 대중을 일깨우고 거대한 사회변혁을 이끌어냈다. 이 저항의 불길은 곧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시민들에게 전해졌으며, 4·19 혁명으로 번져 자유당 정권을 쓰러뜨렸다. 이처럼 2·28은 현대 한국 학생운동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4·19 혁명의 도화선이었다. 2·28 민주운동으로 말미암아 학생운동이 복원됐고 민주주의가 중심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정부도 역사적 중요성과 상징성을 인정해서 올해 2·28 민주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런데 재평가 움직임이 한창인 현시점에서 아쉬운 게 있다면 2·28 민주운동의 정신과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거의 언급이 없다. 이제부터는 그 얘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