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원 논설위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 마칭 밴드의 현란한 음악에 맞춰 반라의 댄서들이 선정적인 춤을 추는 장례식장 모습에 경악스럽다.
얼마전 대만을 방문했을 때 목격한 시골 소도시에서 열린 장례 풍경은 말그대로 축제 분위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예쁜 여자들이 춤추고 노래해 주면 고인이 행복해 하실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대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화임은 분명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구촌이라지만 애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확연한 차이는 의아스럽기만 하다.
이런 풍습은 삶의 질도 중요하지만 죽음의 질도 그에 못지 않다는 뜻일게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죽음을 알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만의 방식일 것이다.
대만 시골의 기이한 장례는 고사하더라도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장례 산업은 하나의 트렌드로 정착되고 인식된 지 오래됐다.
일본의 장례식에서는 대성통곡을 한다거나 실신하다시피 하는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통곡하는 마음보다는 경건한 마음이 더 강하다.
특히 어린아이라도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염습(殮襲:시신을 씻겨 단장)에는 꼭 참석시킨다.
장례식도 밤샘이나 영결식 등의 의식은 하지 않고 간소하게 치러지는 추세다.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가 늘고, 핵가족화하면서 사회적, 인적 관계가 줄어, 단촐한 장례식을 선호하게 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사는 일명 ‘혼족’들이 늘면서 ‘종활(終活, 슈카츠)’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슈카츠는 적극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해 주변 정리나 장례 준비, 상속 등 사후 대책을 세우고 난치병에 걸렸을 경우 인공적인 생명유지 장치의 사용 여부까지 본인이 결정하게 된다.
최근 고독사(孤獨死)가 늘고 말기암이나 난치병으로 고통 받는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웰빙(Well-being)에서 이제는 삶을 잘 마무리하는 방법인 웰다잉(Well-dying)을 논하는 시대다.
올해 2월부터는 연명의료결정법 일명 ‘웰다잉법(고통 없이 죽을 권리)’이 본격 시행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죽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듯 미친듯이 세상을 살고 있다.
죽음이란 영원히 잠을 자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런데 인생의 3분의1를 잠자는데 보내면서도 우리 앞에 다가오면 슬퍼진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잘 죽는다는 것은 사실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 삶을 헛되이 살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을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그만큼 줄어든다고 했지만 그것을 알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참된 삶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살아가면서 좋은 말과 좋은 일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면 이참에 인생의 마지막 무대가 왔다고 생각하고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그런 생각들을 떠올려 보면 장례식이 축제 분위기로 치러진다해도 그리 나쁠 것 같지 않다.
/강동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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