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 too)운동이 거세게 휘몰아 치고 있다. 가슴속 응어리진 말 못할 사연을 대중에게 선언하기까지 당사자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이다.
보다 나은 자신과 사회를 위해 용기를 낸 그들에게 우리는 따뜻이 포용과 위로를 보낸다.
성이라면 둘째가 서러울 정도의 개방적인 프랑스에서도 최근 대중교통에 성범죄 근절 포스터로 “늑대가 당신을 노린다”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런데 본래 늑대는 그런 몰상식한 동물이 아니다.
늑대는 철저한 일부일처제로 수컷늑대는 암컷을 위해서 평생을 보살핀다. 암컷늑대가 죽으면 수컷늑대는 새끼늑대가 독립할때까지 보살핀 후 암컷늑대가 죽은 그 자리에 찾아가 옆에서 굶어 죽는다.
늑대는 약한 상대를 사냥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와 싸운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한 없이 약한 인간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 정도라면 “늑대가 당신을 노린다”가 아니라 우리는 수컷늑대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미투운동을 보면서 서양인과 동양인의 관습에서 오는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아시다시피 서양사람은 과학적이고 수평적인 반면 동양인의 사고는 관념적이고 수직적이다.
서양사람들은 시아버지를 부를때라도 “너”라고 말하거나 시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부른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너”이거나 이름을 그대로 수평적으로 부른다. 역시 그들에게도 부당할땐 가차없이 노(no)라고 분명히 의사표현을 즉각 한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식 율법이 있으며, 감히 시아버지나 대통령 아니, 시의원에게도 깍듯이 존칭을 붙여 예를 갖춰야한다.
이런 문화속에서 “거절 못할 관계”가 이미 생활 깊숙이 녹아있으며, 이를 매몰차게 거절할 경우 “버릇이 없다”거나 “예의가 없다”가 된다.
외국사람이 한국에 와서 영어로 대화할때도 상당히 곤욕을 치르는 경우를 본다. 분명히 노(no)라고 하는 것 같은데 끝에는 실실 웃으며 예스(yes), 예스(yes) 하는 경우다. 이럴 때 서양사람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도대체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때 우리는 서양인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아닌 것은 끝까지 노(no)라고 분명히 말해야 된다. 그래야만 책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지금은 70~80년대처럼 술마시고 거리에서 고함치며 노래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어쩌면 미투의 제일 큰 희생자가 그런 관습에 죄의식을 덜 느끼는 7080 윗세대일 것이다.
오늘도 자고 일어나면 또다른 미투 희생자가 세상 밖으로 솟아난다. 이를 지켜보노라면 한편으로 가해자는 물론 그의 가족, 친지, 친구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초라해보이고 불쌍하다. 그들이 지금껏 쌓은 모래성이 단한번의 파도치는 너울에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고로 “맑은물에 고기가 못산다“고 하듯 100% 뒤집고 단죄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사회적 경종으로 미투가 앞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본다.
자칫 이러다간 동양적인 전통의 정신문화까지 훼손될까 걱정이다.
우리나라는 나름대로 경로사상이 있으며 선배가 후배를 끌어주고 후배가 선배를 따르는 좋은 조직문화도 있다. 이런 한국적인 전통문화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단기간에 폐허에서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일어섰는지도 모른다.
이번 미투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물질과 정신문명에서 새롭게 깨어나는 전환의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