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이재용을 징역 2년6개월에 처한다. 다만 4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5일 오후 3시13분께 서울고법 중법정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항소심 공판. 재판의 주심인 서울고법 형사13부 정형식 재판장이 읽어 내려간 주문(主文)이다. 판결에 따라 이 부회장은 이날 전격 석방됐다. 지난해 2월17일 박영수 특검에 의해 구속 수감된 지 꼭 353일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이 부회장은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1년 가까이 있었던 서울구치소를 떠나 한남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서울고등법원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삼성 소유의 마필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만 뇌물죄를 인정했을 뿐 특검이 제기한 대부분의 공소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초 국정 농단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2016년 11월 최순실을 기소하면서 “삼성은 최순실에게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을 강요당한 ‘피해자’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해 12월 특검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이 부회장은 출연을 강요당한 피해자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성사시켜주는 대가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에게 뇌물을 준 ‘피의자’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특검은 이른바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이 부회장을 옭아맸다.
한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되기도 했지만 이 부회장은 특검의 논리에 의해 결국 구속됐고 지난한 법정공방이 시작됐다.
1심과 달리 항소심 재판부는 부정청탁의 대상인 삼성그룹 승계 작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정유라의 삼성 소유 마필 사용 역시 최고 정치권력자가 삼성을 겁박해 이뤄진 것으로 봤다. 이런 판단의 연장선상에서 재판부는 특검이 2심에서 4차례나 공소장을 변경해 가며 추가 제시한 이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른바 ‘0차 독대’도 인정하지 않았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에서다. 특검이 증거도 확보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재판을 진행했다는 비판이 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1심 재판부가 유죄 근거로 판단했던 이른바 ‘묵시적 청탁’도 뇌물죄 성립 근거가 미약하다면서 실제로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뇌물로 본 삼성의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 대한 승마 지원도 이들이 마필과 차량을 이용했을 뿐 실질적 소유권은 삼성에 있다고 판단했다. 회사를 위한 자금의 해외반출로, 재산국외도피 혐의도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봤다.
굴지의 글로벌 기업 총수와 최고권력자의 ‘세기의 재판’은 그 동안 대한민국을 넘어 온 지구촌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번 판결을 놓고 재판장의 정치적 성향 운운하며 또다시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에 우려를 감출 수 없다. 재판의 결과를 모두가 받아들이고 이번 재판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검은 커넥션을 끊어내야 한다. 기업인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법정에 서는 비극은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이재용 부회장도 그 동안의 참담한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기업 경영에만 몰두해 주길 바란다. 정치가 더 이상 기업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