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왕조(王朝)의 꿈' 현대건설] ③ "이봐 해봤어?"는 옛말…힘 빠진 건설종가
[잊혀진 '왕조(王朝)의 꿈' 현대건설] ③ "이봐 해봤어?"는 옛말…힘 빠진 건설종가
  • 천동환 기자
  • 승인 2018.01.10 0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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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명예회장과 함께 사라진 '도전·개척정신'
건설 키우겠다던 현대차 속내는 결국 적자확인?
현대건설의 대표적 성과물인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경부고속도로와 서산간척사업 유조선공법,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이란 사우스파 4·5단계 가스처리시설.(사진=현대건설)
현대건설의 대표적 성과물인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경부고속도로와 서산간척사업 유조선공법,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이란 사우스파 4·5단계 가스처리시설.(사진=현대건설)

6년여 시간 현대건설을 이끌어왔던 정수현 전 사장이 Recover(회복), Redesign(리디자인), Relight(재점화)라는 의미심장한 키워드를 남기고 떠났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에 담긴 속 뜻은 무엇일까? 현대라는 거대 그룹을 대표했던 현대건설은 창업주 고(故) 정주영 회장의 꿈과 함께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대한민국 산업화의 선봉에 서 왔다. 이 같은 적통(嫡統)을 계승하고 싶었던 현대차그룹은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며 결국 현대건설을 품에 안았다. 하지만 현대건설을 글로벌 종합엔지니어링 기업으로 키우겠다던 그들의 공약(公約)은 말 그대로 공약(空約)이 되고 말았다. 창립 70주년을 넘어 100년을 향한 새로운 출발점에 선 현대건설이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 오너 2·3세의 욕심을 채워 줄 그럴듯한 재물로 전락할지 주목된다.<편집자주>

대한민국 건설역사를 써 온 현대건설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타계한 후 현대건설에서는 도전과 개척의 경영마인드가 함께 사라졌다. 현대차그룹의 품에 안길 당시만 해도 세계적 종합엔지니어링 기업으로의 발돋움이 기대됐지만, 지금에 와서는 현대家의 적자 확인 외에 이렇다 할 인수효과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더 이상 현대건설을 특별하게 보지 않는다.

지난해 창립 70주년을 맞았던 현대건설은 앞으로의 100년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겠다고 밝혔다.

정수현 전 현대건설 사장은 작년 5월 현대건설 본사에서 열린 창립 70주년 기념식 축사를 통해 신뢰와 혁신, 기술개발, 미래를 100년 기업으로 가기 위한 키워드로 제시했다. 전문가적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며 선도자적 위치에 서야한다는 뜻이었다.

그랬던 그가 올해 첫 출발점에 서서 '회복'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걸었다.

정 사장은 올해 시무식사를 통해 "다시금 출발선상에 서있는 우리 모두가 무엇보다도 먼저 회복했으면 하는 것은 현대건설의 혼(魂)이다"며 "우리가 대한민국 대표 건설사로 굳건히 설 수 있었던 것도 결국 현대건설만의 독특하고 특출한 혼과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며칠 뒤 박동욱 신임 사장이 선임되면서 회복의 메시지는 정 전 사장이 현대건설 사장의 위치에서 임직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당부의 말이 돼 버렸다.

현대라는 이름의 시초인 현대건설은 창업주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분신과도 같은 회사였다. 고인이 생전에 자주 썼다는 "이봐 해봤어?"라는 말은 현대건설 특유의 도전과 개척정신을 대변해 왔다.

이 같은 기업정신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대한민국을 단시간에 세계의 경제 강국으로 끌어올리는 1등 공신이었다. 현대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 남긴 역사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이 떠난 현대건설의 지금 모습에서는 과거의 위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보편적 시각이다.

A대형건설사 관계자는 "(선도기업의 이미지가) 이제 많이 희석돼 지금은 어떤 선도적이라는 부분은 많이 없지 않나 싶다"며 "리더십이 과거와 달라진 부분이 클 것이고, 나머지 건설사들의 영업력과 프론티어 정신이 올라오면서 상대적으로 현대건설의 위상이 높아보이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2001년 유동성위기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가 5년만에 졸업한 현대건설의 경영마인드에는 도전과 개척보다 안정과 수익성이 자리잡게 됐다. 현대건설은 리스크를 가능하면 줄이는 방향으로 사업의 가닥을 잡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11년4월 현대건설을 품에 안으며 글로벌 종합엔지니어링 기업으로의 육성 비전을 내놨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수주액과 매출, 투자 등 당시 제시했던 청사진을 적극적으로 달성할 의지가 없음을 내비쳤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 현대건설에 대한 비전이나 육성 전략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룹 차원에서 특정 계열사를 육성하는 계획 자체가 없다"며 "현대건설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우량기업으로서 어느 곳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비전을 가진 회사이니 저희가 답변이 어렵다"고 답했다.

이처럼 현대건설을 인수 할 당시와 크게 달라진 현대차그룹의 입장은 "현대건설 인수의 주된 목적은 현대가의 적통을 차지하려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욕심에서 비롯됐다"는 일각의 주장을 뒷받침 한다.

인수 당시 이 문제를 관심있게 연구했던 전 전국금속노동조합 노동연구원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는) 기업의 논리상 수익성이나 사업능력 확대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전혀 설득이 안되는 부분이었다"며 "현대의 경영서열이 정몽헌 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회장 쪽에 가 있었기 때문에 현대건설을 가져오게 되면 (정몽구 회장이) 현대의 적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거였다"고 말했다.

박동욱 신임 사장의 공식 취임일이었던 지난 8일 아침 현대건설 직원들이 서울시 종로구 본사로 출근하고 있다.(사진=천동환 기자)
박동욱 신임 사장의 공식 취임일이었던 지난 8일 아침 현대건설 직원들이 서울시 종로구 본사로 출근하고 있다.(사진=천동환 기자)

한편, 현대건설의 최고경영자가 엔지니어 출신이었던 정수현 전 사장에서 재무 전문가인 박동욱 사장으로 교체되면서 현대건설의 리스크 관리가 보다 밀도 있게 진행될 것이란 업계의 관측이 많다.

현대차그룹이 제시했던 청사진 달성은 차치하더라도 과거 현대건설의 역동적인 모습은 더욱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B중견건설사 고위 임원은 "재무통이 왔다는 얘기는 리스크관리를 더 강화하겠다는 것"이라며 "사업에 대한 공격성 보다는 향후 건설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하겠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