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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배산성지서 신라 원형집수지 발굴… 영남권 최대 규모
부산 배산성지서 신라 원형집수지 발굴… 영남권 최대 규모
  • 김삼태 기자
  • 승인 2017.11.20 1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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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삼국시대〜신라 토기 등 기와 수백점 출토
사진제공=부산박물관
(사진=부산박물관)

영남 최대 규모의 ‘신라 원형집수지’가 부산 배산성지(盃山城址)에서 발굴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배산성 집수지 발굴조사에서는 부산 최초 목간(木簡) 1점과 국내 최대 죽제(竹製) 발, 돗자리, 삼국〜통일신라시대 토기 및 기와 수 백점이 출토됐다.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은 배산성지 추정 북문지 일원과 지난해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집수지 2기에 대한 발굴조사 학술자문위원회를 21일 오전 11시 배산성 잔뫼정 인근 발굴조사 현장에서 개최한다고 20일 밝혔다.

이번 자문위원회는 연제구청의 의뢰를 받아 지난 4월 12일부터 추진한 배산성지 발굴조사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 유적 조사 및 정비·복원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열린다.

또 연제구청과 부산박물관은 발굴조사 성과를 일반 시민과 공유하기 위해 오는 27일 오전 10시부터 현장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배산성지는 배산(서봉 254m·동봉 246m)의 두 봉우리와 7부 능선을 두르는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부산의 중심지가 대부분 조망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아 부산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산성으로 알려져 왔다.

이번에 조사된 2기의 집수지(集水址)는 모두 원형으로 집수지 붕괴방지를 위해 쌓은 3단의 계단식 호안석축(護岸石築)으로 둘러져 있다. 집수지의 구조는 기장산성, 거제 둔덕기성, 남해 대국산성, 남해 임진성 등 남해안 일원에서 7세기대 신라가 축조한 산성에서 확인되는 집수지 구조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산성지에서 확인된 2기의 집수지 규모는 국내 원형집수지 중에서도 최대급에 속한다.1호 집수지는 최상부 제3단 호안석축을 기준으로 직경 9.5m·깊이 3.2m 규모이다.

2호 집수지의 경우 직경은 13m(굴광 범위 포함 16.5m), 깊이 4.6m로 지금까지 영남지역에서 확인된 신라산성 집수지 중 최대 규모이다. 국내에서는 충북 청원 양성산성 원형집수지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집수지 축조시 다양한 고대 토목 기술이 적용되었음을 밝혀냈다. 호안석축은 ‘品’자형쌓기 수법을 적용해 정교하게 축조됐다. 이러한 축조수법은 신라 성곽에서 주로 확인되는 방식으로 잔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집수된 물의 유출을 방지하고 벽체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서 호안석축과 굴광 사이를 잡석과 황갈색 점토를 1.5~2m 정도의 너비로 두텁게 다져서 뒷채움 했다. 또 집수지는 경사면에 위치하는데 저수량을 최대한 늘리기 위하여 낮은 지대는 성토해 상부 호안석축과 높이를 맞춰 조성했다.

1호 집수지는 2호 집수지와는 달리 바닥을 방사선상으로 구획하여 판석을 깔았다. 판석 상부에서 출토된 상층유물은 기와와 토기편이 대부분이지만, 목기나 초본류(草本類)도 수습되었다.

이 중에서 바닥층에서 수습한 묵서(墨書)의 목간(木簡) 편은 2글자가 정도만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에서 처음 출토된이 목간은 묵서가 판독되면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외에도 대나무를 가늘게 엮어서 만든 발은 길이 약 1.9m·너비 약 0.9m 크기로 표면에는 대나무를 엮었던 것으로 보이는 암갈색 유기물이 체크무늬 형상으로 눌러 붙어 있다. 이러한 발은 함께 출토된 새끼줄과 함께 국내에서 출토된 적이 없는 희귀한 유물로 평가된다.

또 2호 집수지는 바닥을 여러 종류의 점토로 두껍게 층 다짐한 것으로 나타났다. 점토층에는 상하 2차례에 걸쳐 낙엽을 두껍게 깔고 그 위에 돗자리를 얹어 다지는 부엽공법이 확인됐다. 부엽공법은 고대부터 제방이나 저수지, 성곽 등 구조물의 기초 다짐토 사이에 낙엽이나 편물, 나무껍질 등을 두껍게 깔아 다져 연약 지반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상층의 돗자리는 부분적으로 결실된 것으로 보이나 하층에서 출토된 돗자리는 집수지 전면에 걸쳐 양호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돗자리가 출토된 사례는 국내에서 드문 경우이며, 재료 분석를 통해서 당시 식생복원이나 직조기술 등 관련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아울러 1호와 2호 집수지 내부에서는 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되는 그릇, 항아리 등 생활용 토기 등이 출토됐다. 2호의 경우 집수지 인근의 건물이 일시에 무너진 듯 포개진 토기그릇과 함께 암·수키와 수 백여점이 출토됐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신라 경덕왕 16년(757) 12월에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개명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배산성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이 7세기대가 중심이기 때문에 동래군이 설치되기 이전인 거칠산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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